마을은 서산으로부터 15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친환경 농업이 발달할 수 있는 구릉지이며 대호 간척지와 주변에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한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대호만을 끼고 있어 계절별로 토종 민물고기 잡기와 낚시체험을 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서해바다가 위치해 있어 각종 갯벌체험을 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과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아늑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농촌마을입니다.
마을은 정부에서 지정된 무형문화재 및 유형문화재는 없지만 이웃마을(대요1리)에 조선 중기의 명장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진충사』가 있고, 화천1리에는 몽유도원도로 유명하며 조선 최고의 화가인 안견을 기념하기 위하여 1919년도에 새운 『안견 기념관』이 위치하고, 산성2리에는 통일신라말 진성여왕 7년(893)에 고운 최치원이 당시 부성군(현 서산)태수를 역임한 연유로 조선 선조때에 선생의 덕망과 학문을 따르던 지방 유림들이 부성산성 내에 사우를 건립하고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부성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환성1리 볏가리제는 음력 정월 대보름과 이월 초하룻날에 열리는 마을행사로 주민화합과 단결을 도모하고,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이다. 예전에는 3개의 볏가리를 세웠지만 근래에 와서는 마을회관 앞 한곳에만 세우고 그 앞에서 고사를 지낸다. 이어서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며 무사태평을 빌고 흥을 한껏 돋는 마을행사입니다.
비고 | 위치 | 종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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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 지곡면 화천리 | 안견기념관 |
지곡면 산성리 | 부성사 | |
지곡면 대요리 | 진충사 | |
무형문화재 | 지곡면 환성리 | 볏가리제 |
환성리(環城里)는 조선시대에 대산면 문곶리(大山面門串里)와 대산면 탑동(大山面塔洞)지역이었다.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에서도 변화가 없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문곶리(門串里)와 탑동(塔洞)의 일부가 합쳐져 한 동리가 되어 지곡면(地谷面) 소속으로 바뀌면서 자연마을인 고라리(環里)에서 환(環)자를 취하고 옛날 문곶리(門串里)와 지곡면 대요리(大要里) 사이에 동서(東西)로 축성되었던 성곽에서 성(城)자를 따서 지곡면 환성리(地谷面環城里)가 되었다.
문곶리(門串里)란 지명은 1421년(세종3)에 다리곶(多利串), 흥양(興陽), 토진(土進), 맹관(孟串) 등 지방에 있던 목마장(牧馬場)이 대산지방으로 옮겨 오면서 현 환성리(環城里) 1리 목재(項峙)에다 500m의 토성을 쌓고 말도 외부로 뛰어나가지 못하게 할뿐 아니라 말을 밀도살 하거나 개인들이 방매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문(門)을 설치하고 감목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관원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철저한 감시를 했었기 때문에 문곶리(門串里)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1794년(정조14) 대산지방 감목관제(監牧官制)는 폐지되고 평신첨사(平薪僉使)가 감목관(監牧官)을 겸임했다. 이때도 이‘문고지(門串)’ 검문체제는 그대로 존속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대산목장은 평신첨사 김취명(金就明)의 건의로 폐지된 것으로 전해진다. 첨사 김취명(金就明)의 재임기간은 1793~1812년이니 이 사이에 없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200년전 까지 ‘문고지(門串)’라는 감목검문 초소가 이 마을에는 있었다 할 것이다.
감목관(監牧官) 밑에는 목자(牧子)가 10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부역과 병역을 면제 받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로 전시에도 태평성대처럼 편안하게 살았다고 이들의 특권을 호산록에서는 적고 있다.
옛 문곶리(門串里)는 34가구에 80명의 인구가 탑동리(塔洞里)는 67가구에 195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의 문곶리(門串里)는 현 환성리(環城里) 1리와 환성리(環城里) 3리 지역이고 탑동리(塔洞里) 지역은 현 환성리(環城里) 2리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다.
환성리(環城里)에는 큰말(大村), 흔터울(古址村), 작은흔터울(小古址村), 절골(寺谷), 진골(長谷) 빗돌머리(碑石頭), 똥애골 고라리(環里), 노룽구지(老龍串), 덕적골(德績谷), 수영구지(水營串), 배나무골(梨木谷), 검은뿌리(黑嘴), 토끼목(兎項), 돌섬개(石泉浦), 아래벗(下筏), 망미산(望美山), 목재(項峙),금박골(金?谷) 등의 지명이 있다.
환성리(環城里) 1리 2반 지역이고 중심 마을이다. 마을에서 가구가 많고 집단적으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목재(項峙), 문구지(門串里) 등의 별칭이 있다.
환성리(環城里) 1리 1반이고 동편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옛날 큰 부자가 이곳에서 살다가 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환성리(環城里) 1리 1반 지역이다. 흔 터울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이어서 붙여진 마을이다.
환성리(環城里) 1리 4반 지역이다. 서편에 있는 작은 마을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가 없어졌기에 생긴 이름이다.
환성리(環城里) 2리 1반 지역이다. 마을로서 골이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골마을에는 빗돌머리와 똥애골 등이 있다.
환성리(環城里) 2리 1반이며 중심 마을이다. 서산 대산간의 국도변에 위치한다. 높이 2m의 거북비대 위에 세워진 용머리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으로 인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716년(숙종42)에 세워진 것으로 첨사 김상한(金相漢)이 첨절제사 때 선정을 하여 세워준 비석이다. 그 비문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僉節制使金相漢淸德愛民善政碑秉政公靑廉境軍率謹厚御下碩爲死者康熙五十五年丙申十月造立供饋今』
환성리(環城里) 2리 1반이며 빗돌머리 건너편에 있다. 동학란 때 이 지방 동학군(東學軍)들이 일시 이곳에 웅거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환성리(環城里) 2리 2반 마을이다. 2리 마을은 옛날 탑동(塔洞) 지역이었는지 문곶리(門串里) 지역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단 주민들의 정서상으로는 탑동지역이었을 것이다. ‘고라리’란 마을의 지형이 문고리처럼 생겼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문표기로는 고라리(古羅里)로 표기하기도 한다. 오랜 옛날로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이 8대째 세거해 오는 곳이다. 구한말에 평안도 영유 군수를 역임한 이규용(李圭容)은 벼슬을 그만 둔 뒤 고향에 내려와 마을 앞에서 자염(煮鹽)으로 구한말에 서산지방에서 제일의 갑부가 되었었다. 마을이 바다와 접해있고 바람을 피할 수 있게 아늑한 자연환경이어서 자염을 구어 내는 벗터(筏)의 위치로서는 최적이었다. 그는 자염을 굽는 것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과 직접 소금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 또 현 대로리 1리인 광암에 거주하던 전 홍문관 교리를 지낸 김약재(金若濟)와 같이 대산리에 강사(講舍)를 세우고 부강장(副講長)이 되어 후진교육에도 힘쓴바 있다. 그 후 그의 자 이종원(李鐘遠)은 재력을 키우는데 더욱 힘써 부를 더 키웠다. 그는 이곳에다 큰 개와 집을 지어서 이때에 이 마을의 전성기였음을 과시 하였었다 전해진다. 이때 사람들은 고라리 부자 집이라 하였고 수확량이 쌀 4000여석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 태안지방에서 최고의 갑부였던 이희열(李喜烈)이 살았던 곳이 이 마을과 같은 이름인 환동(環洞)이고 또 부자가 되는 방법도 자염(煮鹽)과 소금무역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 마을에서는 인재육성과 배출에도 힘써서 인물들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환성리(環城里) 3리 1, 2, 3반 지역이며 중심 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형이 늙은 용의 형상과 같이 생겼다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심성이 착하고 긍정적이어서 열심히 사는 마을로 이름나 있다.
환성리(環城里) 3리 1반 지역이다. 옛날 경기도에 있는 경기도옹진군덕적도(德積島) 사람들이 이 마을에 와서 간척지를 매립하고 정착하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라 한다.
환성리(環城里) 3리 3반지역이다. 이곳은 들 물이 빠르게 들어오는 곳이다. 대산 구진에 첨사진(僉使鎭)이 있을 때 주사(舟師)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얻어진 지명이다.
환성리(環城里) 3리 3반 지역에 있다. 옛날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서 얻어진 이름이다.
환성리(環城里) 3리 3반 마을의 서북쪽 끝 바닷가에 노출된 암석이 모두 검은 암석(岩石)으로 되어 있어 얻어진 이름이다. 이곳 돌은 조약돌하나까지 검은 빛이다. 뿌리(嘴)란 지형의 끝이란 뜻이다.
환성리(環城里) 3리 3반에 있다. 지형이 토끼목처럼 잘록 진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환성리(環城里) 3리 3반에 있다. 바닷가에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어 예부터 이름났던 곳이다. 마을사람들이 고기를 잡거나 패조류를 채취하려 바다에 드나들 때 마시거나 씻는데 이물을 이용했었기에 ‘돌샘개(石泉浦)’란 이름을 얻었다.
환성리(環城里) 3리반에 서북 편 끝에 있다. 자염을 굽던 벗(筏)이 있어서 생긴 지명이다. 남쪽편에도 큰 벗(筏)이 있어 그 벗을 윗 벗(上筏)이라 하고 이 벗(筏)을 아래 벗(筏)이라 했었다.
환성리(環城里) 3리와 대산면 영탑리(令塔里) 2리 사이 경계에 위치한 121m의 산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변 지형이 최고 10~30m 이내의 낮은 산으로 된 지대에서 융기하여 솟은 산이라 산위에 오르면 조망이 좋다. 그래서 망미산(望美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일명 망월산(望月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달을 바라보는 산이라는 뜻이다. 대산지방의 산(山)들이 이산에서 시작되어 분기되어 나간 산들이다. 산이 어디서 보아도 커 보이진 않아도 안정성이 있고 비옥한 땅이어서 봄에는 산나물이 풍부하고 여름에는 산야초가 잘 자라 마을 사람들에게 목초와 땔감을 제공해주는 고마운 산이었다. 마을에서는 이산(山)을 경외(敬畏)한다. 대산읍 독곳리 출신 시인 봉은 김용돈(鳳隱金容敦1899~1984)은 일찍이 대산팔경을 지었는데 이 망미산(望美山)을 대산의 제일 경으로 하여 대산팔경을 지었다.
(望美山秋月) | 망미산추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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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子洞南有一峰) | 정자동 남쪽 한 봉우리 있으니, |
(態如美人立從容) | 그 자태 미녀 같이 조용히 서 있구나. |
(碧天秋月揚明色) | 가을 푸른 하늘 밝은 달빛 들어내니, |
(能使詩人爽快胸) | 시인의 가슴도 능히 상쾌하여 설레 이겠네. |
환성리(環城里) 1리에 위치해 있다. 대산반도(大山半島)로 가는 도중 가장 좁은 목(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대산복장을 관리통제 하기위한 성곽(城郭)이 있었다. 이 성곽에는 대산(大山)을 출입하는 사람과 모든 것들을 감시하는 문(門)이 세워져 있어서 이 주변 마을을 문곶리(門串里)라 하였고 1914년까지 대산면 관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