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출신인 현동자 안견은 조선 초기 산수화 풍을 창출한 한국화의 대가로 신라의 솔거, 고려시대 이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로 손꼽힌다.
현존하는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은 조선 초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곽희파 서풍을 바탕으로 안평대군의 부탁을 받고 단 3일만에 그린 몽유도원도이다.
광해군 11년에 기록한 서산의 지방지 호산록에 안견의 출신지가 서산시 지곡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산 문화의 뿌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서산시는 4천7백만원을 들여 안견의 출신지인 지곡면에 몽유도원도를 실측크기로 조각한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어 한국화인 창출자인 안견의 자연애호사상을 현창하고 미술 학도의 정신적 지주로 승화시킴은 물론 국민 정서 순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해 91년 10월 기념관도 건립했다.
기념관은 사업비 2억2천여 만원을 들여 지곡면 화천리 대지 4백 평에 한 양식 충형 건물(건평 80평)로 세웠는데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견의 유작품인 적벽도 소상팔경도 사시팔경도 등 모사품 18점이 전시되어 있다
안견은 자(字)를 가도(可度), 득수(得守)라 하고 호(號)를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라 하였으며 정확한 생존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세종년간(1419-1450)에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고, 성종년간(1469-1494) 초까지도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릴 당시 이미 정4품의 호군(護軍)벼슬을 하였는데 6품이 한계였던 화원의 신분으로 정4품까지 올라간 것은 매우 파격적인 경우로써 조선 건국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후대의 화가나 화론가들이 그를 찬탄하는 글을 남기고 있는데 성현은‘용재총화’에서 “안견은 천성이 총민 한데다 고래의 명적을 많이 보고 연구하여 그 요체를 터득하고 고금 명가들의 장점을 모두 규합 절충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였으며, 그의 산수화는 특히 빼어났다”고 적고 있다.
안견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았고 안평대군의 소장품중에 많은 수를 차지한 북송대 곽희의 화풍을 토대로 여러 화풍을 소화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산수화에 가장 특출하였으며 그밖에도 초상, 화훼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그러나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 남아있는 작품은 ‘몽유도원도’ 한 점 밖에 없다. 그 외에 ‘사시팔경도’ ‘소상팔경도’ ‘적벽도’등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데이들 작품을 통해서 그의 화풍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에 어떤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여행하고 거기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 주어 3일만에 완성된 그림인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최고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에서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일반적인 두루마리 그림과는 반대로 그림의 왼쪽으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는 독특한 화면구성을 들 수 있는데 화면의 좌측 아래쪽에서 우측 위로 대각선을 따라 현실세계와 꿈속의 세계를 효율적이고도 치밀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평원과 고원의 대조를 통해 산세의 웅장함과 환상적인 느낌을 더욱 고조시키고 넓게 펼쳐진 도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부분과는 달리 이곳만 조감도법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세부표현도 매우 뛰어나 선묘는 세밀하여 일획의 실수도 없이 정갈하며 박락되어 흔적만 살펴볼 수 있는 복사꽃 꽃술의 금채를 제외하고는 정교하게 채색된 부분 역시 아직도 화려함과 영롱함을잃지 않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 구석에 지곡가도(池谷可度)라는 안견의 관지(款識)가 있고 이어서 주문방인(朱文方印) ‘가도(可度)’가 찍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