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최치원은 경무왕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18세 때 급제하였으며 2년 간 낙양을 유랑하며 시를 짓는데 몰두하였다.
중국에 머물면서 황소의 난 등을 직접 겪으며 귀국한 뒤 의욕을 가지고 이미 무너져 가고 있던 신라 사회에 당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 중심의 귀족사회에서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신분체계의 한계를 느껴 외직을 지원하였다. 대산군(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를 지냈으며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전환기에 살았던 대표적 지식인이다.
조선 선조 때 그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는 유림들이 "도충"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 흥선대원군 때 훼손되었다가 순종 1년(1907)에 새단장 하였고, 1913년 당시 서산군수가 태수로 지냈던 곳의 명칭을 따라 "부성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외삼문, 내삼문, 동재, 서재 등의 부속 건물이 있고 그가 직접 쓴 ´과선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 남쪽에 건립된 부성사는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 7년(893)에 고운 최치원이 당시 부성군 (현 서산) 태수를 역임한 연유로 조선 선조 때에 선생의 덕망과 학문을 따르던 지방 유림들이 부성산성 내에 사우를 건립하고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다.
당시 사우의 이름을 도충사(道忠祠)라 불러오다가 건물이 훼손되어 1913년 10월에 당시 권익채 서산 군수가 현재의 지리로 이건 하고 사우의 이름을 부성사로 개명하였다.
최치원은 37세(893)의 나이로 부성군태수 역임 시에 조정에서 선생을 하정사로 삼아 당나라에 파견하려하였는데 당시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전국에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 해인 진성여왕 8년(894)에 선생이 당시의 시무책(時務策)을 상소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선생에게 육두품의 벼슬인 아찬을 내렸다.
현재의 부성사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평삼문형식으로 건립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4각 주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의 동서재가 있고 이곳을 지나 조금 높게 조성한 일곽의 대지 위에 사괴석 담장을 돌리고 그 안에 사당을 건립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평면을 구성하고 전면 1칸통을 개방하여 전퇴(全退)를 만들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창로는 정면 3칸 모두 삼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건물의 구조는 가공된 자연석 기단을 조성하고 원형주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무출목 초익공계이며 창방위에 소로가 중앙칸에 4개 양협칸에 3개씩을 놓아 주심도리 장혀를 받쳤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크기는 본당(34㎡) , 내삼문(9㎡) , 동재(41㎡) , 서재(26㎡), 외삼문(2㎡)이다.